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워드로스 2세 (문단 편집) === 귀족 의적 === 카사는 10대 중반에 켄푸의 군대에 입대하면서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북서부와 [[에리트레아]] 일대에서는 북쪽의 이집트 태수령[* [[메흐메드 알리]]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이미 [[오스만 제국]]에게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쟁취했다.]과 에티오피아 사이에 분쟁이 종종 일어나고 있었다. 1837년, [[수단]] 지역의 소수민족 루파족이 이집트군을 피해 에티오피아로 도망쳤다. 그들을 눈여겨본 켄푸는 루파족들에게 군사를 더 붙여주어 수단에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이에 분노한 수단 총독 아흐마드 카시프는 켄푸의 부하에게 뇌물을 주고 루파족 족장을 납치해 와서 처형한 후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켄푸가 다스리는 뎀비야를 침공했다. 아흐마드 카시프는 루파족과 함께 온 켄푸 군대의 숫자를 보고 켄푸 군대의 숫자를 과소평가해서 턱없이 적은 군사를 데리고 갔다. 이에 켄푸는 20,000명의 군사를 내어 이집트군을 포위하면서 와드칼타부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경험이 없던 아흐마드 카시프는 켄푸 군대를 보고 겁먹어 도주했고, 켄푸는 기병대를 돌진시켜 이집트군을 쉽게 제압했다. 이 공격의 선봉에 카사가 섰다. 카사는 몸소 돌격하여 적을 여럿 베고 이집트군 장수를 생포했다. 카사는 멋지게 데뷔했지만 곧 역경이 닥쳤다. 카사를 후계자감으로 생각해서 잘 키워 준 켄푸가 막상 자신의 아들 메콘넨이 장성하자 메콘넨에게 뎀비야 땅을 물려주고 싶어지게 되면서, 카사를 껄끄럽게 여기게 된 것이다. 다행히 1839년, 켄푸가 죽어서 은인인 켄푸와 싸우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켄푸가 죽자 뎀비야를 노리고 다못 공작 겸 고잠 공작 데자즈마흐 고슈 저우디가 북상하여 뎀비야를 급습했다. 메콘넨, 메콘넨의 동생, 카사는 힘을 합쳐 고슈 저우디와 맞서 싸웠지만 많은 군사를 거느린 고슈 저우디에게는 역부족이었고, 카사는 도망쳤다. 그렇게 몇 달간 기회를 노리며 방황했지만 틈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카사는 현실에 순응하고 고슈에게 가서 복종을 맹세하여 그의 군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고슈 저우디는 처음부터 그를 백안시했는지 아무리 무공을 세워도 승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전역하고 고향 크와라로 돌아갔다. 하지만 크와라로 돌아온 카사를 꺼리는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제국의 황후 메넨 리벤 아메데였다. [* 제국 황제 [[요하네스 3세]]의 아내이다. 자신보다 정치력이 훨씬 부족한 남편을 멋대로 폐위시켰다 복위시켰다 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고슈 저우디가 뎀비야를 점령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뎀비야가 무주공산이 되었는데, 이에 메넨 리벤이 슬쩍 관리를 파견해 뎀비야를 슬쩍 자신의 사유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카사는 뎀비야를 통치할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마음이 기울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메넨 리벤이 파견한 관리는 카사를 추방했다. 분노한 카사는 산적[* 정확히는 동아프리카권의 전통적인 도적 스타일인 시프타이다. 시프타는 단순히 살인, 약탈을 즐기는 도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중국 [[수호전]]의 [[양산박]] 같이, 최소한의 낭만과 질서를 지키는 반정부 무법자에 가까운 조직이었다.]이 되었다. 카사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쌓은 무공 덕분에 이미 유명인사였던데다가 잘생기고 유능해서 순식간에 많은 전사들이 카사를 따르기 위해 모였다. 그가 처음에 크와라에서 추방당했을 때 그를 따르는 전사는 12명이었지만 곧 전사 300명이 찾아와서 산적단에 가입했다. 본격적으로 거병할 때는 600명이 넘는 기병대가 생겼다. 카사는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에티오피아 북서부 전역을 활보했다. 카사의 도적단은 주로 어느 곳의 누구를 털겠다고 공공연하게 발표한 후, 한밤 중에 기병대로 기습하여 순식간에 털어먹고 사라지는 수법을 사용했다. 주요한 공격 대상은 상인들과 세금 운반인들로, 이들은 여느 전근대 농업국가가 그렇듯 대다수 농민들의 미움을 사는 존재였기 때문에 카사의 이미지가 크게 올라갔다. 그리고 수도 곤다르로 가야 할 세금이 끊기면서 제국 중앙정부도 진땀을 흘릴 만큼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카사는 악녀 이미지가 강했던 황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이렇게 약탈한 세금의 상당량을 에티오피아 곳곳의 농민들에게 이 돈으로 농기구와 씨앗을 사라면서 나눠주었다. 이런 카사의 행보에 제국의 국민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고 그를 영웅시했다. 결국 중앙정부의 권위는 나날이 추락하게 되었고 반대로 카사는 제위를 차지할 새롭고 강력한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사의 행보에 식겁한 메넨 리벤 황후는 카사를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 그를 끌어안으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1840년대 초반에 황후의 손녀 테와베흐 알리를 카사에게 시집보냈다. 테와베흐 알리는 메넨 리베 황후가 첫 남편인 예주 공작 라스 알룰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라스 알리의 딸이었다. 라스 알리는 당시 에티오피아 제국 섭정이었기 때문에 테와베흐 알리는 상당히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다. 카사는 정략결혼, 심지어 정적의 손녀였지만 테와베흐 알리를 처음 만나고 한눈에 반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메넨 리벤 황후는 카사에게 크와라 땅을 떼어주어 총독으로 삼고 각종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여기까진 좋았지만, 정작 메넨 리벤 황후는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끝까지 카사를 불신하여 카사를 박대한데다가 카사의 처갓집 사람들, 즉 황후의 집안 사람들도 계속 카사를 공공연히 모욕하게 내버려둔 것이다. 결국 카사는 아내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처갓집에 원한만 한가득 쌓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